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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4.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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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양주시의 유래
작성자 이익규
내용 양주시(楊州市)의 유래

고향이 양주 광적출신으로 제가 양주시의 유래에 대해 잘못 알고있는 것(버들양자와 무관하지만 버드나무는 많은게 사실이며(한자로는 볕양자에 고을주를 씀) 바로잡습니다!

위키백과에서는 2003년 이전의 역사는 양주군 문서를 참고하라기에 양주문화원(楊州文化院)에서 발급한 양주세거성씨(楊州世居姓氏)의 유래(由來)에서 옮겨왔습니다.

*양주시(楊州市)의 역사*

삼한시대에는 마한에 속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땅이었으나 군사적 요충지로서 고구려의 남진정책에 따라 고구려와 백제가 번갈아 점령하는 등 그 변화가 심하였다.
기록에 나타난 첫 명칭은 매성군(賣城郡) 또는 마홀(馬忽)이었다.
신라의 삼국통일 후 신라의 북진에 따라 매초성(買肖城)에서 675년 20만 당나라군을 격파하였다.
경덕왕 16년(757년)에는 래소군(來蘇君)에 속했으며 고려시대에는 정종 2년(947년)에 견주(見州)로 개칭하였다.
조선 건국 후 태조 3년(1394년)에 수도를 한양(漢陽)에 정하고 한성부(漢城府)를 설치하게 되자 한양부(漢陽府)를 동촌 대동리(지금의 서울 광진구 구의동 항골)로 옮기고 양주(楊州)라 했으며 태조 6년(1397년)에 읍의 중심지를 견주(見州)의 옛터(주내면
고읍리)로 하고 양주(楊州)라 하였다.
태종 13년(1413년)에 양주도호부(楊州都護府)를 두었으며, 세종 12년(1430년)에는 양주목(楊州牧)으로 승격되었으며, 진(鎭)을 두어 인근 군현을 관할하였다.
수도 서울의 동쪽 광나루를 기점으로 북한강을 경계로 북으로 임진강, 한탄강에 이르기까지 동북지역 전체를 아우르는 한강이북 최대의 고을 대양주(大楊州)가 6백년 동안 전개되었다 고 기록해 있다.
조선왕조를 창업한 태조가 함흥(咸興)으로 떠났다가 무학대사의 간청으로 태종 3년(1403년) 환궁(還宮)하다가 전좌(殿座)마을(현 의정부시 호원동)에서 머물고 있을 때, 조정의 대신들이 찾아와 국정을 논의하여 의정부(議政府)라는 지명의 유래가 되었다.
이후 “의정부(議政府)”는 조선시대 최고 행정기관의 명칭이 된다.
양주는 1408년 태조의 건원릉(建元陵)이 자리한 이래 많은 왕릉이 자리하여 왕릉을 수호하는 고을로 위상이 높았다.
경국대전이전외관직(經國大典吏典外官職)의 기록에 의하면 양주목사(楊州牧使)는 정3품으로 광주, 여주, 파주와 함께 경기도의 1등 외관직이었다.
태종 10년(1410년)이래 지금의 군청소재지인 양주읍 유양리에 양주관아인 경기 제1의 고을의 목사가 부임하는 치소(治所)가 되면서부터 겸해 왕의 순행처가 되기도 하였다.
당시 양주의 별칭은 광릉(廣陵)이었다.
연산군 10년(1504년)에 잠시 양주를 없앴다가 중종 1년(1506년)에 회복되면서 관아를 불곡산(佛谷山) 남쪽으로 옮겼다.
양주목 관아가 있던 유양중심은 1천여 호가 넘었다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覺)에 기록되어 있다.

삼각산, 도봉산, 수락산, 불곡산을 안고 있어 산수자연이 수려하고 비옥한 토지에 인심 좋고 살기 좋은 고장이었으며, 산수경치가 뛰어나 풍류를 알려면 양주로 가라는 이야기도 있었다고 한다.
구한말 1894년 갑오개혁 이듬해 고종 32년(1895년)에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 366군의 지방제도 개정으로 한성부(漢城府) 양주군(楊州郡)이 되었고, 1896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경기도 양주군이 되었다.
조선 건국이후 수백년간 양주는 동북지방 최대의 고을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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